퇴계 이황으로부터 전해내려 온 안동 선비 정신의 정수(精髓) 시간의 흐름은 풍경을 바꾸고, 물건들의 모양과 빛깔을 변하게 한다. 그러나 그 속에 깃든 맑은 정신만은 세월에 바래지 않는 교훈으로 우리의 정신을 일깨운다.
안동 치암고택은 조선 선비의 고장이자 독립운동가의 고장으로 유명한 안동에서 일제의 국권 피탈로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비분강개한 끝에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난
치암 이만현(恥巖 李晩鉉)의 옛집으로 총 22칸 규모다. 1973년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1호로 지정되었으며 원래 도산면 원촌리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인해
1976년 이곳 안막동으로 이건하였다. 퇴계 이황의 후손이 지키고 있는 고택답게 집안 곳곳에서 퇴계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바위에도 부끄러웠던 울분지사의 마음 이만현은 퇴계의 11대손으로서 홍문관교리를 거쳐 언양현감을 지냈으며 평생 퇴계의 학문사상 계승과 심신 수양에 힘썼던 인물이다.
5천년 간 지켜온 나라가 일제에 침탈 당했을 때 그가 느꼈던 울분은 '부끄러운 바위'라는 뜻의 '치암(恥巖)'이라는 호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바위도 저렇게 제 자리를
지키는데 사람이 어찌 나라와 역사를 빼앗길 수 있는가. 바위에조차 부끄럽구나'라는 생각에 호를 '치암'이라 했다고 한다. 현재 치암고택 솟을대문 옆에는 단단한
바위 하나가 문지기처럼 자리하며 이만현의 올곧은 선비 혼을 기리고 있다. 치암고택 아래쪽으로는 향산 이만도(響山 李晩燾)의 집으로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9호인
향산고택이 자리하고 있는데 향산 역시 경술국치의 치욕으로 극심한 울분을 느껴 단식한 끝에 목숨을 끊은 순국의사다.

숲을 병풍 삼고 계곡 물소리를 거문고 소리 삼는 조용한 풍류 고택은 안채와 사랑채가 '口'자 형태를 갖추고 있으나 사랑채가 안채보다 높이 솟아있고, 사랑채 우측 누마루가 옆으로 돌출된 독특한 구조다. 사랑채 중앙에는 위패를
모시고 있는 중간마루가 있는데 현재 다실(茶室)로 쓰이고 있다. 고택 전체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숲은 아침저녁으로 새 소리와 풀벌레 소리 등 청명한 자연의 소리를
들려주고, 계곡에서부터 흘러나온 물은 마당 한켠에 아담한 연못을 이루고 있다. 때문에 고택의 분위기는 도심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더없이 조용하고
그윽하다. 유난히 사람을 잘 따르는 하얀 강아지 '설이'가 꼬리를 흔들며 반기는 모습에 오랫동안 떠나왔던 고향집을 방문하는 듯한 따뜻함이 느껴지기도 한다.